채플린 재판을 돌아본다

찰리 채플린 (Sir Charles Spencer Chaplin)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희극배우이겠지만 그의 인생은 비극으로 가득했다. 그 중 1944년의 친자확인 소송은 비극적이다 못해 희극적이었다. 이 재판은 어떤 여자가 자기 아이의 아버지가 채플린이라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채플린은 그 아이가 절대로 자기 아이일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으므로 재판부는 과학적 검사를 실시하였다.

그 때는 아직 DNA테스트가 없었으므로 아이와 남자의 혈액형을 검사하여 친자확인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조사 결과 아이의 혈액형은 B형이고 채플린의 혈액형은 O 형으로 판명되었다. 즉 그 아이는 채플린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증거가 재판에 제출되었지만 배심원들은 11대 1로 채플린이 아이의 아버지라고 판결하여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채플린은 판결결관에 크게 실망하고 분노한 나머지 1952년 미국을 떠나 스위스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렇다면 배심원들은 왜 과학적 증거를 무시했을까?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서는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가득해졌다. 영화를 통해 늘 자본주의 사회를 풍자해 오던 채플린은 공산주의자로 몰려 많은 비난을 받았다. 미국연방수사국(FBI)은 그를 몰래 조사하고 심지어 형사 고발을 하였다. 그러자 대중들도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일거리도 대폭 줄었다.

소송은 채플린이 미국 정부와 사이가 좋지 않을 때 시작되어 채플린의 인기를 더욱 떨어뜨렸다. 미국 신문들은 단정적으로 기사를 써서 채플린을 비난했고 그는 하루아침에 처자식을 버린 나쁜 인간이 되었다. 배심원들은 “채플린은 공산주의자이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므로 그의 말은 믿을 수 없다. 그까짓 혈액형 검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그 때 할리우드의 많은 배우들이 그랬듯이 보통 이 정도면 대개 미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정부에 적극 협력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채플린은 온갖 비난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지만 여전히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고 사회적으로 박해받는 사람들을 감싸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자 FBI는 더욱 극단적인 수단을 선택했다. 1952년 그의 새로운 영화를 홍보하고자 채플린이 미국을 떠나 영국으로 향하자 미국 정부는 채플린의 재입국 허가를 취소하고 다시 미국에 입국하려면 정치적 견해에 대한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채플린은 영국 국민이었기 때문에 이런 조치가 가능했을 것이다. 채플린은 미국 정부에 간청하는 대신 스위스로 이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막무가내의 인민재판 같은 채플린 재판이 끝났지 70여년이 되었다. 그 동안 우리는 곳곳에서 수많은 인민재판과 캥거루 재판을 보아왔다. 앞으로 70년이 지나면 그 때는 합법적인 절차나 공정한 기준 없이 그저 정권의 입맛에 맞는 수사와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가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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