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도 료마를 생각하며

사카모토 료오마 (坂本 龍馬)는 일본에서 인기투표를 하면 지금까지 모든 일본인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뽑히는 사람이다.  그는 1835년 11월 당시 도사번 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날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음력 11월 15일이라고한다.  그는 낮은 신분의 무사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다른 형제나 자매들과는 달리 도무지 얌전히 살지 않았다.

그 때까지 일본은 임진왜란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도쿠카와 막부 (幕府) 가 일본왕을 대신하여 3백년간 대대로 통치하고 있어 막부의 쇼군 (將軍)을 정점으로 하는 숨막힐듯한 신분 질서가 유지되는 안정된 사회였다. 그런데 1853년 어느 날 느닷없이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일본에 나타나 개국을 요구하여 삽시간에 일본 전체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대포로 무장한 서양인들에게 놀란 막부는 통상을 허락하여 조용하던 일본에 미국뿐만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등 외국인들이 나타났다. 칼 한자루만 달랑 들고 있던 일본에 대포와 기관총을 든 외국군이 나타났으니 막부가 겁을 먹고 외국인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막부의 굴욕적인 개국 정책에 반기를 든 보수적 일본 사무라이들은 사대주의자인 막부를 타도하고 정권을 일본왕에게 돌려주어 서양오랑캐를 몰아내자는 존왕양이( 尊王攘夷) 의 기치아래 막부타도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방정권들은 막부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으려고 존왕양이론자들을 가차없이 탄압하였으므로 존왕양이론자들은 탄압을 피해 소속 번 (藩)을 떠나 독자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들을 낭인 (浪人) 이라고 하였는데 료마도 27세부터 낭인이 되어 일본 전역을 떠돌아 다녔다. 대부분의 낭인들이란 사회불만집단일 뿐이고 국제적 상황에 대해서는 무식할 뿐더러 터무니없는 일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오합지졸들에 불과했으므로 초기에는 막부의 탄압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끊임없이 아시아를 노리는 열강의 움직임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계속되는 암살과 살육으로 점차 막부지지자들과 일왕지지자들 사이에는 증오가 쌓여가고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커져갔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개화파와 수구파의 싸움으로 나라전체가 엉망이 되었던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료마는 막부지지세력의 중심이던 사쓰마번과 존왕양이세력의 중심이던 죠오슈번을 화해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1866년 지금까지 서로 숙적이던 사쓰마와 죠오슈는 단결하여 평화적으로 정권을 막부로부터 일왕에게 넘기기로 합의하였다. 이것을 대정봉환 (大政奉還) 이라고 하는데 이에 따라 막부를 지지했던 프랑스나  일왕쪽을 지지했던 영국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일본은 피비린내라는 내전을 겪지 않고 근대국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만약 내전이 일어났다면 외국의 무기를 앞다투어 사다가 동족을 죽이는 데 사용하였을 것이고 아마도 오랜 내전후 기진맥진한 일본은 식민지로 전락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정봉환의 기적은 그자신 누구보다도 존왕양이 혁명에 앞장섰던 료마가 적극적으로 평화적 정권교체에 나서지 않았다면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역사의 드라마였다.  주변동지들이 막부의 탄압아래 희생되고 가족들도 쓰라린 고초를 겪어도 료마는 과거의 원한에만 얽매이지 않았다. 료마는 가난한 하급무사의 집에서 태어나 칼이나 쓸 줄 알지 서당교육외에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틈틈히 글을 읽어 세계 정세의 흐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적의 목이나 잘 베는 사무라이로 시작했지만 어른이 되어 독학으로 국제법을 공부하였고 국가가 부강해지려면 해군과 해상무역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 예지자였다. 또 열강의 아시아 침략이 본격화되는 시대였으므로 아무리 증오하는 내부의 적이라도 국가적 위기상황에서는 과거를 잊고 단결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당시 걸핏하면 할복이나 하고 살육을 일삼던 일본의 사무라이들 중에 료마처럼 트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19세기 일본의 행운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과 같이 료마는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보지 못하고 1867년 12월 10일 교토에서 자객단의 기습을 받고 암살되었다. 암살자들은 막부쪽 비밀결사대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데 사실 이미 료마에 대한 막부의 암살명령이 취소된 것을 모르는 일부 자객들의 소행이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음력 11월 15일로 그의 생일이었다.  생전에 료마는 매우 실용적인 인간이었는데 실용적이기는 료마 이후의 일본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정봉환이후 마침내 정권이 존왕양이를 주장하던 세력에게 넘어온 뒤 일본 정부는 놀랍게도 어제까지 그렇게 부르짖던 “양이”를 버리고 서양문물을 과감하게 받아들여 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우리에게도 피로 피를 씻는 정치 보복으로 파국을 부르는 여야가 화해를 하는 기적이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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