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같은 유화 정책의 끝

체임벌레인
뮌헨회담에서 돌아온 체임벌레인 총리

1938년 9월 29일 영국 총리 체임벌레인은 독일 뮌헨으로 가서 히틀러와 회담한 끝에 히틀러가 그토록 집요하게 원하던 체코의 수데텐 지역을 히틀러에게 넘겨버리는 뮌헨 협정을 맺었다. 체임벌레인은 체코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의 나라땅 인 수데텐 지역을 통째로 독일에 넘기는 대신 독일이 더 이상 어떠한 영토적 요구도 하지 않는 다는 히틀러의 공식약속을 받았다. 뮌헨 협정에서 당사국인 체코는 초대되지도 않았고 히틀러는 커다란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체임벌레인 총리도 비록 우방국 체코를 희생시키기는 했지만 참혹한 전쟁을 피하고 유럽에 평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하고 의기양양하게 영국으로 돌아왔다. 체임벌레인은 공항에 도착하자 모여있는 지지자들에게 협정문안을 휘두르며 외쳤다.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 역사상 두번째로 영국의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제 이 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임을 믿습니다. (My good friends, for the second time in our history, a British Prime Minister has returned from Germany bringing peace with honour. I believe it is peace for our time.)” 군중은 환호했고 유력 신문들도 앞다투어 “우리 시대의 평화”를 헤드라인으로 하여 수상의 노력으로 평화가 왔다는 것을 강조하여 체임벌레인을 칭송했다. 영국 국민들은 불과 20년 전에 끝난 제1차 대전의 끔찍했던 기억을 아직도 지우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을 막고 “평화”와 “화해”를 강조하는 뮌헨 협정을 지지했다. 체임벌레인은 독일에 대해 오랫동안 “유화정책 (Appeasement Policy)”의 입장을 고수했다. 유화정책이란 독일의 도발적 행동에 대해 가능하면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정책으로 전쟁을 혐오하는 당시의 국민 정서에 맞는 정책이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전부 체임벌레인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보수당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은 체임벌레인에 대해 “귀하는 전쟁과 치욕중에서 치욕을 골랐다. 그러나 귀하는 전쟁도 하게 될 것이다.” ( You were given a choice between war and dishonor. You have chosen dishonor and you will have war) 라고 총리의 유화정책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러나 처칠은 그 때 이미 10년 가까이 정부내에서 아무 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는 야인이었으므로 그의 의견은 무시되었다. 게다가 체임벌레인을 비롯한 보수당 지도자들은 처칠은 예의바르고 신사적인 (?) 나치 독일 정권을 믿지 못하고 나치 정권의 말이라면 무조건 나쁘게 보는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처칠은 줄기차게 나치 독일을 믿지 말고 영국이 속히 전쟁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오히려 주류 언론과 정치계에서 “전쟁광”으로 낙인찍혀 비난과 비웃음을 받았다.

그러나 1939년 9월 1일, 평화를 걸고 수데텐 지역을 쉽게 손에 넣은지 불과 1년도 채 못되어 나치는 뮌헨협정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이어 네델란드 덴마크 와 프랑스로 물밀듯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나치에게는 국제적인 협정이나 상식, 그리고 신사협정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속은 줄을 알게 된 체임벌레인은 부랴부랴 독일에 선전을 포고하고 나서 그 동안 나치를 믿었던 자기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체임벌레인은 당내외에 강력했던 지지 기반을 이용하여 여전히 필사적으로 총리직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치에 놀아난 그의 실책은 냉정한 심판을 받아야만 했다. 전쟁이 점차 확대되자 1940년 5월 7일에는 그의 친구이던 레오 애머리 (Leo Amery)까지 의회에서의 연설을 통해“귀하는 지금까지 해온 좋은 행동에 비해 너무 오래 자리에 머물렀다. 말하노니 이제 끝내자, 그만두라. 신의 이름으로 가라.(You have sat too long here for any good you have been doing. Depart, I say, and let us have done with you. In the name of God, go.) 고 일갈하여 체임벌레인의 사임을 촉구했다.

여당도 야당도 국민도 등을 돌리자 사면초가의 입장에 빠진 체임벌레인은 하는 수없이 1940년 5월 10일 자리에서 물러나서 총리직을 그가 싫어하는 윈스턴 처칠에게 물려줄수 밖에 없었다. 체임벌레인이 히틀러에게 속아 유화정책에 매달려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영국은 제대로 전쟁 준비를 하지도 못한 채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독일과의 전쟁에 내몰렸기 때문에 그의 유화정책은 실패한 정책의 전형으로 두고두고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체임벌레인은 총리를 그만둔 지 불과 6개월 후 쏟아지는 세간의 비난속에 암으로 쓸쓸히 죽었고 그의 뒤를 이은 처칠은 결국 고난을 무릅쓰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내 세기의 영웅이 되었다.

체임벌레인은 처칠과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되었다. 체임벌레인은 비록 옥스포드나 케임브리지와 같은 명문대학을 나오지는 않았지만 버밍검 대학을 나왔으므로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처칠보다 학벌도 좋았다. 처칠이 키가 작고 뚱뚱한데 비해 체임벌레인은 잘생기고 키가 컸을 뿐만이 아니라 처칠이 늘 거만하고 독선적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에 비해 체임벌레인은 온화한 신사로서 정치계에서의 평도 좋았다. 그러나 역사는 체임벌레인에게 냉정하다. 역사는 체임벌레인을 그저 히틀러에게 속아 하마터면 세계를 구렁텅이에 몰아넣을 뻔 한 바보로 기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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