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이 되어버린 중국의 귀공자 왕징웨이 이야기 (1)

왕정위
왕정위

중국인들은 외세의 앞잡이가 되어 중국을 배신한 중국인을  한간 (漢奸)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친일파란 말이 원래는 일본과 친한 사람이란 말에서 지금은 매국노라는 나쁜 뜻으로 사용되듯이 한간은 지금 중국에서 아주 나쁜 욕이다.

중국의 역사가 오래되어 한간의 숫자도 엄청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왕정위 (汪精衛) 왕자오밍 이라고도 하고 또는 왕징웨이라고도 하는 인물이다. 그는 당시에는 중국을 대표하는 미남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어쩌면 왕징웨이는 우리나라의 이완용과 비슷한 듯하다. 둘 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나라의 인재였고 커서는 정부의 주요한 자리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둘 다 막강한 일본에 대적하느니 차라리 일본 앞에 엎드려 사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둘 다 일본에 협력하여 자기 나라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왕징웨이는 중국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일찍부터 총명한 아이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일본 유학을 하여 법률 공부를 했다. 그런 정도면 그저 관리가 되어 편히 먹고 살만한데, 청소년 기부터 손문 (쑨원)의 ‘독립혁명회’에 가입해서 활동했고 심지어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의 부친을 죽이려고 폭탄을 던지는 테러를 하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 부터 국제적인 안목과 시대의 흐름을 읽는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청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알고 당시에는 그저 위험한 선동꾼에 지나지 않았던 쑨원의 동지가 되었다. 결국 그의 예측대로 청나라는 무너졌고 그는 쑨원의 국민당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특히 격동의 시기에 중국 국민 정부의 외교부장(외교부 장관) 을 맡아 세계 외교 현장에서 꽤 활약을 하였고 심지어 당시 미국 타임지의 표지에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한 일을 보면 왕징웨이는 좀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그는 중국 정부가 공산당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외교 장관일때는 독일의 히틀러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왕징웨이는 처음에는 좌익과 가까운 개혁인사였지만 점차 극우 파시스트와 친해졌다. 극좌 공산당과 극우 파시스트.. 서로 극과 극인데 어떻게 둘 다 친할 수가 있을까?

이 이상하게 보이는 조합은 사실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1939년 소련 공산당 정부는 갑자기 독일 나치 정부와 불가침조약을 맺고 서로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이어 1941년에는 극우 파시스트 정권인 일본과 소련이 소일중립조약을 맺어 서로 친하게 지내기로 약속했다. 그러니 어쩌면 왕징웨이야 말로 아시아에서 현실적으로 국제적 안목이 있는 몇 사람중 하나였을 지도 모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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