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울 것인가 타협할 것인가? 목숨을 건 왕징웨이의 고민 (2)

왕징웨이
나치 지도자들과 건배하는 왕징웨이

왕징웨이는 매우 똑똑하고 현실적인 사람이었으므로 1937년 7월 7일 북경 인근 노구교에서 시작된 충돌을 빌미로 일본이 중국을 전면적으로 침공하자 나라의 운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왕징웨이는 당시 쑨원의 뒤를 이어 국민 정부의 수반이던 장제스 (蔣介石)가 항일을 내걸어 사실상 일인 독재를 한다고 생각했다. 원래 왕징웨이는 쑨원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장제스와 경쟁하던 사이였으므로 서로 관계가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일본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달랐다. 당시 왕징웨이는 일본은 막강하여 중국이 도저히 이길 수 없으니, 서로 공연히 싸워 불쌍한 중국 국민을 희생시키지 말고 서로 잘 지내는 것이 중국 국민들을 위해서도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장제스는 완강하게 반대하며 중국과 중국 국민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일본과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왕징웨이는 어차피 이기지 못할 전쟁을 장제스가 왜 고집을 피우면서 계속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실 그의 생각이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1940년에 프랑스는 나치 독일군이 침공하자 끝까지 싸우지 맞서 싸우지 않고 항복한 다음, 평화롭게 사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 국민들은 대규모 폭격을 당하거나 살륙을 당하지 않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의 보호 아래 그럭저럭 편히 살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그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 알고 있다. 그러므로 왕징웨이의 방법이 어쩌면 중국인들에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중국의 힘만으로는 일본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러니 프랑스의 비시 정권이나 핀란드 정부가  독일에게 그랬듯이, 중국도 적당히 일본의 요구도 들어주면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버티다가 혹시 연합국이 승리할 것 같으면 중국은 막판에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말을 바꾸어 타는 것이 좋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1938년 당시에는 이런 시나리오가 전혀 현실성이 없었다. 아직 유럽에서는 이차 대전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연합국이라는 것도 없었다. 중국을 돕는 나라도 없어서 중국은 혼자서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1937년에 일본군이 대규모 침공을 하자, 장제스는 정부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기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중국의 미래는 누가 봐도 암울했다. 중국 국민당군은 지리 멸렬해서 싸우기만 하면 일본군에게 대패했고 중국 공산당은 산속에 꼭꼭 숨어 나오지도 못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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