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믿었던 왕징웨이의 끝 (3)

중일전쟁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이어지자 국민 정부의 부총재이고 장제스의 강력한 라이벌이던 왕징웨이는 국가적으로는 망하기 직전인 중국을 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장제스에 빼앗긴 정권을 되찾기 위해 일생일대의 모험을 한다. 왕징웨이는 최측근 몇 명만 데리고 국민 정부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을 빠져나와 베트남으로 도주했다. 충칭에서는 왕정위가 국민 정부를 배신하고 일본과 손을 잡는다는 소문이 바로 퍼졌고, 중국 정부는 곧 그를 반역자로 낙인찍었다.

베트남의 하노이에 머물면서 그는 일본 정부와 중국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계속 접촉했다. 일본의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왕정위와 같은 거물급 인사가 자기들 품으로 뛰어들어온 것을 너무나 기뻐했다. 고노에는 왕징웨이 정도의 거물이라면 저 구석으로 도망친 장제스 정권을 대신할 새로운 중국 정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장제스가 보낸 암살단이 하노이의 은신처를 덮쳤다. 왕징웨이의 최측근 쩡중밍은 죽었지만 왕징웨이는 구사일생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그는 바로 일본인 점령지역인 상해로 갔다.

그 이후 일본과 어느 정도 협상이 마무리되자 왕정위는 중국의 오랜 수도였던 난징에서 일본의 괴뢰 정부인 중화민국 난징 국민 정부를 세우고 스스로 주석직 (대통령)에 올랐다. 그가 일본 측에 붙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장제스에 반대하던  상당수의 국민당 인사들이 그를 따라 난징으로 와서 친일 정권의 수립에 가담했다. 하지만 일본과 왕징웨이의 기대와는 달리 난징 정부는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오히려 강경한 반일 투사로서 장제스의 인기만 올려준 셈이었다.

어쨌든 그는 난징 정부를 수립할 때 일본 정부와 중국과 일본이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상호 협력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군사와 외교를 비롯해서 왕징웨이 정부의 모든 것을 일본이 만들고 지켜주는데 어떻게 중국과 일본이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왕징웨이가 바보가 아니었다면 자기 정부가 만주국처럼  정부의 꼭두각시이고 자기는 만주국 황제 푸이처럼 그저 허수아비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왕징웨이의 난징 정부는 일본이 만주국을 비롯해 중국에 세운 수많은 괴뢰 정권의 하나에 불과했는데 왕징웨이는 자기 정부가 전체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부라는 망상을 가진 듯하다.

일본의 철저한 간섭과 비협조로 인해 왕징웨이는 그저 난징에서 잘 먹고 지내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도 없어졌다. 처음에 내걸었던 “중일화친”이나 “일본군의 중국철군”은 점차 꿈 같은 일이 되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가끔 일본에 가서 일본이 내걸었던 대동아공영권을 합리화해주는 들러리 역할 뿐이었다. 그러자 큰 기대를 가지고 그를 찾아온 난징 정부의 인물들 사이에도 그의 곁을 떠나 왕징웨이를 사기꾼이나 친일파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몸도 마음도 지친 그는 골수암에 걸렸다고 한다. 이래 저래 낙심한  왕징웨이는 1944년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고 일본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마지막 유언으로 “일본은 너무 무도하다”고 하여 마치 자기가 일본에 속았다는 듯이 말했다고 한다. 사람은 어쨌든 끝까지 자기 합리화를 하는 모양이다.

색계

일세의 수재였고 국제적 안목이 있었던 왕징웨이도 불과 몇 년 앞을 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 2007년에 개봉된 영화 색계가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 양조위가 맡았던 이모청은 실제로 있었던 안물인데 딩모춘이라고 하는 자로 왕징웨이가 세운 난징 정부의 고위층 인물이엇다고 한다. 이 영화가 민족 반역자인 왕징웨이 정권을 좋게 그렸다고 해서 중국에서는 이 영화의 제작 의도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지금은 경기도 분당 주민이 된 여주인공 탕웨이씨는 그런 비난 때문에 한동안 힘들었다고 한다.

왕징웨이가 죽었을 때, 그의 유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본군은 난징에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이를 두꺼운 콘크리트로 막아 아무도 무덤을 훼손할 수 없도록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장제스 정부가 난징에 돌아오자 국민당 정부는 배신자 왕징웨이의 무덤을 폭파하고 그의 유해를 강가에 버렸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1979년에 반역자 이완용의 무덤도 증손자에 의해 파헤쳐져서 유해가 강가에 뿌려졌다고 한다. 이 것까지도 비슷하다. 다만 이완용의 경우에는 해방이 된지 34년이나 지난 1979년까지도 온전하게 그 무덤이 존재했다는 것이 오히려 놀랍다.

당대 중국에서는 미남 사인방의 하나였고 명문 가문의 도련님, 국민당 정부의 부총재까지 역임했던 왕징웨이는 이렇게 갔다. 좌우를 막론하고 중국이 남아 있는 한 그의 부끄러운 이름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일본의 욕심을 간과하여 잘못된 유화 방침과 부끄러운 굴종으로 일관하면서 “화평”을 부르짖었지만 역사는 왕징웨이를 내부의 단결을 저해하고 외부의 적과 내통한 반역자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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