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후방에서 게릴라 전을 전개하여 대한민국을 괴롭히던 빨치산들이 있었다. 국군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병력을 최전선에서 빼내 후방으로 돌려야 했다. 1951년 8월 어느 날 국군은 가야산 일대에 활동 중이던 빨치산들이 합천 해인사에 모여 있다는 첩보를 얻었다. 그래서 공군은 즉시 출동해서 그 일대를 폭격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귀환했다. 그 덕에 해인사에서 보관중이던 소중한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무사할 수 있었다.
전쟁중에는 어쩔 수없이 문화재의 파괴와 약탈이 일어난다. 사람의 생명조차 덧없이 스러지는 판에 문화재나 미술 작품은 말할 것도 없다. 전쟁 때문에 사라진 문화 유물은 하나 둘이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의 몬테 카시노 수도원 사건이 꽤 유명하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1944년 초에 일어났다. 유럽 대륙에서는 오직 소련만이 독일과 싸우고 있었다. 소련군의 피해가 커지자 화가 난 스탈린은 즉시 미영군이 유럽에 상륙하여 제 2 전선을 만들지 않으면 소련은 독일과 단독 강화를 하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뜨끔했던 미국과 영국은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영국의 처칠 총리는 이탈리아가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추축국의 “부드러운 배”라고 강조하면서, 이 곳을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미영 연합군은 1943년 9월 시실리에 상륙하여 마침내 유럽 대륙에서 독일과 싸우기 시작했다.
한편 연합군의 상륙하자 이탈리아 국민들은 적군인 연합군을 열렬히 환영하고 예상대로 이탈리아군은 쉽게 무너졌다 그러나 위험을 느낀 히틀러는 명장 케셀링 장군을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제 이탈리아 전투는 연합군대 독일군의 대결이 되었다. 마음이 급했던 연합군은 하루 속히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로 진군하려고 했다. 그러려면 그 길목에 독일군이 구축한 이른바 구스타프 방어선을 뚫어야 했다.
연합군은 클라크 장군이 이끄는 미 제 5군을 중심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폴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공 등이 총 동원되었고, 이탈리아의 반 파시스트 의용병까지 모두 25만 명의 대군이었다. 게다가 연합군은 제공권을 장악했으며 포병 전력이나 기갑 전력도 독일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연합군이 아무리 화력을 퍼붓고 총공격을 가해도 구스타프 방어선은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특히 독일군은 산 위로부터 정확한 포격을 하여 연합군 병사들의 피해가 속출했다. 그러니 사실 이탈리아는 처칠이 말한 부드러운 배가 아니라 딱딱한 등이었다. 44년 1월의 제 1차 총공격은 무려 만 여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면서 연합군의 참패로 종료되었다.
연합국 사령부에서는 하루빨리 로마로 가는 길을 열라고 매일 같이 난리인데, 현장에서는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할 뿐 도무지 앞으로 가지를 못했다. 당황한 클라크 장군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하루 빨리 독일군 방어선을 뚫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