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木馬)는 주인(主人)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草木) 옆에서 자라고
문학(文學)이 죽고 인생(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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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선생이 이 시를 쓴 것은 1955년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특히 하루를 살기도 힘들었던 사람들은 아무도 시를 읽지 못했을 것이다. 울분과 슬픔, 절망과 고통으로 가득 찬 젊은이들은 어두운 호롱불 아래 찌그러진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를 마시며 괴로운 하루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이 시는 그런 절망의 바닥에서 나온 기적이다. 이 때 “버지니아 울프” “페시미즘”이란 말이 나왔다는 것조차 지금 보면 경이롭다. 27살의 나이에 이런 글을 썼다니 그는 정말 천재였나 보다. 박인환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갑자기 29살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어쩌면 그 것은 그의 무의식적 선택이었지도 모른다. 맑고 깨끗한 영혼의 시인에게는 1950년 후반의 우리나라는 살아 가기에 너무 힘든 때였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