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에서 배우는 오늘의 지혜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영화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영화 "남한산성"

새해부터 주변을 돌아보니 이 나라를 둘러싼 상황이 심상치 않다. 지금 대내외 상황을 보니 그 옛날 병자호란이 생각난다. 1623년 인조반정을 통해 정권을 잡은 서인 집단은 선왕(先王) 광해군이 명나라를 멀리하고 후금과 가까이 하는 것은 해괴한 일로써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인조반정의 이유 중 하나로 내세웠다. 

마침내 반정으로 하루 아침에 정권을 잡자 이들 서인들은 광해군 치하의 대북 (大北) 정권과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당시 북부 중국의 강자로 떠오른 후금을 오랑캐의 나라라고 더욱 노골적으로 무시하면서 이른바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였다. 사실 후금으로서도 아직 명나라의 잔당들을 말끔히 소탕하지 못했으므로 배후의 조선과 또 전쟁을 하는 것이 부담이었으므로 그동안 양 국은 몇 번의 충돌과 갈등에서도 아슬아슬한 평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636년이 되었다. 조선은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기를 거부하여 그렇지 않아도 호시탐탐 전쟁의 빌미를 찾고 있던 청에게 기회를 주었다이를 계기로 곧 청나라가 침략을 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자. 조선에서는 청나라와 전쟁을 피하고 화해하거나 평화롭게 지내자는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한 자도 있었지만, 그런 자들은 바로 역적으로 몰리고, 조정의 대세는 척화선전(斥和宣戰) 하는 자들에게 기울어졌다. 이 들 서인 강경파들은 이른바 원칙과 정도(正道)를 고수해야 한다는 명분론을 앞세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청나라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되풀이 하였다.

그러자 무능한 임금 인조는 이 같은 강경론에 밀려, 청나라에게 먼저 전쟁을 선포하는 “선전(宣戰) 교서”를 내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해버렸다. 이에 청은 1636년 12월 28일, 10만의 군사로 침공하여 전광석화처럼 한양까지 밀려왔다. 결국 인조는 원래 피신하려고 했던 강화도를 가지 못하고 남한 산성으로 피신해야 했는데 성안에는 장기 농성전에 대비한 아무 준비가 없었다. 준비안된 전쟁으로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던 결국 인조는 삼칠일 (21일) 만에 항복하여 조선 역사상 최대의 치욕인 삼전도의 굴욕을 겪어야 했다. 
 
사실 삼전도의 굴욕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임금과 조정을 믿고 있다가 하루 아침에 죽거나 청으로 끌려간 수 백만의 백성들이다. 오늘날 역사책들은 인조의 굴욕에 대해서는 상세히 설명하고 개탄하면서 정작 이렇게 희생된 수 많은 백성들의 비극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그런데, 지금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서인들은 왜 그토록 무모한 전쟁론에 집착했을까? 그 들은 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을까? 심지어 남한 산성에 포위되어서도 곧 임진왜란때처럼 명나라 군대가 도우러 올 것이다, 남도의 근왕병이 올 것이다 라는 황당한 희망으로 주전론을 꺾지 않은 서인들의 무식함에 질릴 지경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자기들의 오판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국왕인 인조가 그런 치욕을 당했어도, 자기들의 무모한 주전론으로 조선 팔도가 불바다가 되어, 수 많은 백성들이 죽고 다쳤어도, 그 들은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미안해 하거나 책임을 지기는 커녕, 이 들 서인 강경파들은 병자호란의 비극을 백성 탓 그리고 온건파 탓으로 돌렸다. 그 들은 결코 반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 임금인 효종때에는 병자호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이른바 “북벌론”을 꺼내 그나마 남은 온건파들을 숙청하고 자기들의 세상으로 만들었다. 물론 그들 강경파들이 북벌론을 무기로 하여 조정내 온건파들을 숙청했지만 결코 북벌을 하지는 못했다. 그 북벌론이라는 것은 그저 반대파 숙청을 위한 헛된 구호였을 뿐이다.
 
 그 들은 이렇게 자기들의 세상을 만들어,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내놓지 않았다. 백성들이야 굶어죽든 말든, 나라야 불바다가 되는 말든, 그 들은 그저 청나라에 대한 몽매한 국민들의 적개심을 잘 이용해서 끝까지 잘 살아남았던 것이다. 서인 강경파들은 말도 안되는 이론을 근거로 병자호란을 자초하였으나 그들은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줌도 안되는 그들은 오히려 그 전쟁을 이유로 조선이 망할 때까지 자손들에게 부귀와 권세를 물려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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