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어느 점술가가 세계적인 화가 폴 고갱 (Paul Gauguin)의 사주를 보았다면 그의 운명에 얽혀있는 역마살을 지적했을 지도 모른다. 고갱은 처음부터 자기 나라인 프랑스와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고갱의 외가는 남아메리카의 페루쪽 혈통이었고 그 덕분에 그도 일곱 살이 될 때까지 페루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 그의 모국어는 불어가 아니라 스페인어였다. 이러한 이국적인 배경과 경험은 나중에 고갱의 인생과 그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원래는 증권회사에서 일했지만 인생의 중반기에 경제적으로 어렵고 심리적으로 외로웠던 고갱은 뒤늦게 화가로 인생을 새출발하였다.
그 때 고갱은 더 이상 프랑스에서 버티기 어려웠기 때문에, 아내와 자식들은 처가로 돌려 보내고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타히티로 떠났다. 타히티는 남태평양의 섬나라로 프랑스 식민지였다. 본국에서 가난하고 힘들게 살던 고갱에게 타히티는 그야말로 낙원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문명에 물들지 않은 원주민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담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여 유명한 “해변가의 타히티 여인들 (Tahitian Women on the Beach)”과 같이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하지만 아름답고 평화로운 고갱의 그림들에는 사실 원주민들의 슬픈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고갱은 이미 프랑스에서 문란한 생활로 인해 매독에 걸려있었지만 타히티로 옮겨간 후 다시 여러 명의 10대 소녀들과 동거하면서 많은 아이들을 낳았다. 매독은 끔찍한 고통을 주는 성병이지만 치료약은 20세기에 들어서야 발명되었으므로 그 당시에는 아직 치료약도 없었다. 고갱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별다른 죄책감없이 원주민 소녀들을 통해 타히티에 매독을 퍼뜨린 것이다.
그 후 고갱은 스트레스와 고독으로 인한 우울증과 매독으로 인해 생긴 정신병에 시달리면서 건강이 차차 악화되었고 울분에 가득 차서 계속 주변 사람들과 말썽을 일으켰다. 이렇게 싸움과 욕설로 나날을 보내던 중 고갱은 마침내 현지의 프랑스 총독과도 충돌하여 명예훼손 혐의로 타히티 감옥에 가게 되었다. 하지만 고갱은 실제로 감옥에 가지는 않았다. 형기를 시작하기 직전에 그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