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딘 디엠 (응 오딘 지엠 Ngô Ðình Diệm ) 부터 구엔 반 티우 (응우엔 반 티에우 Nguyễn Văn Thiệu) 까지 남 베트남 공화국을 이끌었던 많은 대통령들은 재임 기간 내내 격렬한 반대와 저항에 시달렸다. 위에서는 북베트남 (월맹)의 정규군이 끊임없이 무장 병력을 남으로 침투시켰고 내부에는 전국적으로 조직화된 공산군 민병대 (베트콩)가 곳곳에서 무장 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은 60년대가 저물면서 서서히 베트남에서 발을 빼려는 눈치가 역력해서, 남베트남 정부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미국의 진보 진영에서는 대대적인 반전 시위를 연일 계속하면서 미국 정부에 조기 종전을 압박했다.
더욱이 베트남 국내에는 지식인, 학생, 불교도, 농민 할 것 없이 매일 같이 시위를 하면서 공산측과 협상을 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이에 발맞추어 공산측은 이른바 통일 전선 전술로서 남베트남 정부가 그들을 적대시 하지 않으면 자기들도 즉시 모든 적대 행위를 그만두고 남베트남 정부와 평화적으로 공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내외의 반대와 막대한 비용에 지친 미국은 남베트남 정부의 반대를 무시하고 1973년 이른바 파리 평화 협정을 북베트남 정부와 체결하고 협정에 따라 남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 시켰다. 당사자들이 베트남에서 평화를 가져올 것을 약속한 파리 협정이 체결되어, 베트남에 평화를 가져온 공로로 미국의 키신저 국무장관과 북베트남의 레둑토 대표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1975년 북베트남은 파리 평화 협정을 헌신짝 처럼 내버리고 남으로 물밀듯이 진군했다. 동남아 최고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남베트남 군대는 삽시간에 무너졌고 남베트남 정부는 항복했다. 공산측이 점령한 이후 남베트남에서는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고 수 백만의 사람들이 강제노동 수용소에 끌려가거나, 고문을 받고 혹은 죽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아무 배나 집어타고 망망대해로 도망쳐 남지나해에는 이른바 “보트 피플” 이 넘쳐났다.

북 베트남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미국의 진보 세력들은 북 베트남이 파리 협정을 깨고 공격할 때도, 남베트남에서 대규모로 숙청이 전개될 때도, 수 많은 보트 피플이 바다에서 죽어가도 이를 모른 척했다.
남베트남 정권 아래에서 그렇게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던 남베트남의 진보 세력들은 모두 공산 체제에 순응했다. 이 전에 티우 정권에 온 몸을 던져 저항하던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은 정작 공산 정권의 통치에는 모두 겁을 먹어 시위를 하기는커녕 조용히 사라지거나 쪽 배를 타고 베트남을 탈출했다.
일찌감치 재산과 가족을 챙겨 미국으로 도주한 남베트남의 지도층들은 위기 상황에서 도와주지 않은 미국과 공산측의 전술에 놀아난 남베트남의 반정부 세력을 원망하면서 미국에서 조용히 살아갔다. 북의 침공시 약속을 깨고 도와주지 않은 미국 정부에 특히 분개한 응우엔 반 티에우 대통령은 미국 대신 타이완으로 망명했다. 공산측의 약속에 속아 남베트남을 공산측에 가져다 바친 키신저는 노벨 평화상을 반환하지 않았다.
보트 피플중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은 남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에 “리틀 사이공”이란 마을을 만들고 산다. 그 들은 뒤 늦게 나마 이를 갈며 지금의 공산 베트남 정부를 증오하여 이제는 사라진 남베트남 정부를 기억하려고 애쓰고 있다. 지금 그들이 리틀 사이공에서 아무리 자주 남베트남의 국가를 부르고 남베트남 국기를 게양하여도 이미 너무 늦었다. 공산 진영의 레토릭에 속아 스스로 어리석게 나라를 들어 북의 전제 정권에 바친 사람들에게 아마 두 번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참고: 남베트남 공화국 국가: https://www.youtube.com/watch?v=N9Jcqwrdhn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