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동의 지배자는 이란이었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이란은 팔레비 국왕이 다스리는 왕정이었는데, 그 지역에서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팔레비 국왕은 군부의 절대적 지지 위에 야심차게 서구화 개혁을 밀어붙였다. 팔레비 왕은 이란을 영국처럼 개방적이고 선진적인 나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이란에서 “샤한샤”로 추앙되었는데, 그 것은 “왕중왕” 그러니까 세상 모든 왕들의 왕이란 뜻이다.
팔레비 왕은 서구화와 경제 발전은 같이 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서구적 민주주의를 과감하게 도입했다. 이웃의 사우디나 쿠웨이트와 같은 대부분의 중동 나라들이 엄격한 이슬람교 율법 아래 여성을 동물 취급하고 집밖에 나오지 못하게 할 때, 팔레비 왕은 여성들이 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굳이 히잡과 같은 종교적 복장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TV나 영화관에서는 서구의 팝송이나 헐리웃 영화가 방영되었다.
이처럼 당시 이란은 풍부한 석유로 벌어 들인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야심차게 서구화를 진행시켰다. 그러자,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경제 성장에서 소외된 이란의 전통적 지배 계층들이 불만을 갖고 서구화 정책을 반대했다. 이 들은 서구화 정책은 이슬람 전통을 모욕하는 것이며, 결국 서방의 문화적 식민지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황당한 주장에 대해 팔레비 왕정은 반정부 세력에 대해 처음부터 강경책으로 일관했다. 전국 곳곳에 경찰과 비밀 요원들이 깔려 반정부 인사들을 감시했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짓을 하면 바로 체포했다. 하지만 70년대 말이 되자 점차 팔레비 왕조의 오랜 집권과 부패에 불만을 가지는 세력들이 많아졌다. 이들은 점차 과격화되어 공공시설에 폭탄 테러를 하기도 하였고, 시위도 폭력 시위가 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반정부 소요 사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팔레비 정권의 필사적인 노력과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팔레비 정권은 1979년 1월 결국 무너졌다. 그 후 이란은 초보수적인 신정국가로 바뀌어 19세기로 돌아갔고 그 곳에서 인권 탄압은 그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국민에게 자유와 선택을 주려고 했던 팔레비 정권은 일찌감치 무너졌지만, 국민을 억압하는 사우디나 쿠웨이트의 전제적 왕조는 아직도 건재하다. 누군 가는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중동 사람들에게 개방이나 서구화는 그저 사치일지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