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보 다리” 에서 떠올리는 경계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인생

"Portrait of Guillaume Apollinaire (1904-05)" by Maurice de Vlaminck

Sous le pont Mirabeau coule la Seine

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Et nos amours

우리들의 사랑도 흐른다.

Faut-il qu’il m’en souvienne

나는 기억해야만 하나,

La joie venait toujours après la peine

괴로움 뒤에는 늘 기쁨이 따랐다는 것을.

Vienne la nuit sonne l’heure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이 시를 기억하시나요?  연애 시의 수작으로 꼽히는 “미라보 다리 (LE PONT MIRABEAU)” 를 쓴 기욤 아폴리네르 (Guillaume Apollinaire) 는 말하자면 르네상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잘생겼고, 어학, 시, 그림, 캘리그라피 등 많은 분야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며 당대의 많은 유명 인사와 친분이 있었습니다. 특히 화가 마리 로랑생과의 떠들썩한 연애는 그 때 파리에서 유명했지요.

하지만 그는 경계인 (marginal man) 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누구였는지 조차 불분명했으며 어머니는 러시아에 살던 폴란드 사람이었지요. 그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유럽 여러 곳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하지만 어느 나라도 그에게 안식을 주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정착한 프랑스에서조차 그의 뛰어난 외모와 재능도 결국 그를 주류 사회에 넣어주지는 못했지요. 1911년 루브르에서 모나리자가 도난당하자 프랑스 경찰은 이탈리아 태생의 그를 의심해서 구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진정한 프랑스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제1차 대전이 일어나자 36살의 나이에도 그는 프랑스 군에 자원 입대해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의 부상과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그만 38살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지요.

부질없는 이야기이지만 그가 그 당시 유럽의 변방인 이탈리아나 폴란드, 러시아 출신이 아니고 만약 프랑스인으로 태어났다면, 그렇다면 굳이 입대를 하여 프랑스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그는 오래 살아 아마도 세상에 더 많은 기여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국의 힘이 약하다는 것은 천재에게도 슬픈 일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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