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일은 전 소련 외무부 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 (Andrei Gromyko) 씨가 세상을 떠난 지 23년이 되는 말이었다. 그로미코씨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소련”)이 가장 강했던 시기인 1957년 부터 1985년 까지의 긴 기간 동안 소련의 외교를 도맡았다.
서구는 물론 소련의 지도부조차 계속 바뀌는 그 30년 동안 그로미코씨는 굳건히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놀라운 처세술을 보여주었다. 그 긴 기간 동안 그는 핵전쟁의 문턱에서 고민하던 미소 양국의 위기 때마다 전면에 등장하여, 서구와의 문제를 원만히 해결했다.
그는 1909년 벨라루시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그 역시 노동자로 일생을 마칠 운명이었지만 1917년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 어른이 되어 공부를 마친 그는 타고난 재능과 열정으로 소련 정부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고, 특히 그로미코가 미국 경제 전문가라는 점이 그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소련 외무부 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 씨는 뼛속까지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다. 하지만 그는 냉철했고 국제적 안목이 있었다. 크레믈린에 앉아 모험적이고 환상적인 플랜만 늘어놓던 스탈린이나 후루쇼프와는 달리, 그는 모험 대신 실리를 찾는 스타일이었다. 냉전 기간 중에는 1962년 쿠바 위기를 비롯해서 미소간에 자칫 무력 충돌이 일어날 뻔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핵무기로 완전 무장한 양 국가 중 만약 한 쪽이 핵공격을 개시하면, 상대의 보복 공격으로 결국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말은 결코 공상 과학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로미코는 특유의 친화감과 외교술로 많은 위기 상황을 최소화하여, 45년에 걸친 냉전 기간 중 한 번도 미소가 직접 충돌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 그는 브레즈네프가 집권하자 이른바 “데탕트 (Détente, 동서간 긴장 완화)” 정책을 주도하였다. 그의 노력과 미국의 호응으로 미소 양국은 1968년부터 전략 무기 감축 협상 (SALT)을 비롯한 많은 군축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었다. 그 때 핵전쟁의 공포에서 한 숨 돌리게 된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 이룬 70년대의 긴장 완화 현상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로써 그로미코는 소련 뿐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인정하는 유능한 소련 지도자로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하지만 1980년대 말, 소련 경제가 망가지자 소련 당국은 속죄양이 필요했다. 1989년 초 그로미코는 브레즈네프를 대신해 모든 책임을 지고 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에게 사임서를 제출했다. 그는 은퇴하고 곧 이어 7월 2일 사망했다. 그는 결코 착하거나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매우 유능한 외교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