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츠 폭동이 일어난 지 벌써 56년 이 되었다. 와츠 폭동은 1965년 8월 11일. 미국 로스 앤젤레스시의 와츠 (Watts)지역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난 것을 말한다. 사건의 발단은 그저 흔히 있던 흑인 주민과 백인 경찰의 충돌이었다. 하지만 아발런가와 116가 사이의 교차로에서 시작된 충돌은 경찰이 흑인 임산부를 구타했다는 루머가 돌아, 가만히 있던 주민들까지 자극했다. 결국 이 충돌은 주민들의 집단 행동으로 이어져 점차 사태가 악화되었다.
와츠 지역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이른바 사우스 센트럴 (South Central)이라고 불리는 저소득층 거주 지역으로, 절대 다수의 주민들은 흑인들이다. 이후 5일 동안 와츠 지역의 흑인들은 거리를 점거하고 상점을 약탈하며 곳곳에 불을 질렀다. 이처럼 미국 대도시의 한 복판에서 무법천지의 상황이 계속되는 것을 본 백인들은 깜짝 놀랐다.
부랴부랴 미국 연방 정부가 군병력을 동원해서 소요를 진압하고 보니, 이 폭동은 무려 34명이 사망하고 4,000 여명이 체포되는 거대한 사건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사건은 곧 1967년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과 같이 비슷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후유증을 남겼다. 훨씬 뒤 1992년에 일어난 L.A. 폭동도 여러 가지 면에서 와츠 폭동과 닮았다.
이 당시는 냉전 시대라서 미국과 소련이 서로 체제 경쟁을 하던 시기이다. 미국은 열심히 세계에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와츠 폭동은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켰다.
와츠 폭동에서 흑인 주민들은 미국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하며, 미국의 하층 계급이 살기가 얼마나 힘든 지를 보여주었다. 이 전까지 남부에 머물러있던 흑인들은 대공황과 제이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와 같은 대도시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어디서나 극심한 인종차별로 이들이 거주할 곳은 별로 없었다. 갈 곳을 찾던 이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쉬운 도심에 무허가집을 짓고 거주하면서 뉴욕의 할렘, 로스앤젤레스의 사우스 센트럴, 시카고의 사우스 지역을 만들었다.
하지만 흑인들의 생활은 비참했고 미래조차 없었으므로, 이들은 항상 범죄와 교도소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와츠에서 돌발적인 사건이 일어나자 그동안 억눌러왔던 흑인들의 분노가 터져 나온 것이다.

한편 늘 온순하던 흑인들이 갑자기 폭력적 행동을 하지 크게 분노한 로스앤젤레스 경찰 서장 월리엄 파커씨는 흑인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강경 진압을 지시했다. 이에 대해 흑인들은 강력히 저항했고, 이에 대한 백인들의 입장도 강경했다. 파커씨는 흑인 시민들을 “베트콩”이라고 비난했고 당시 캘리포니아주 주지사이던 팻 브라운씨는 흑인들이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도시 게릴라 전쟁을 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문제의 원만한 해결보다, 무조건 유혈 진압을 강행하여 문제를 더 크게 만들었다.
군병력이 투입되자 흑인들에게 큰 피해를 남기고 폭동은 진압되었지만, 그 후 미국의 백인들은 흑인 폭동에 대해 공포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1992년 L.A. 폭동 때는 경찰 병력이 흑인 지역에서 일찌감치 진압을 포기하고 물러나, 베벌리 힐즈와 같은 백인 지역의 보호에 집중하는 전략을 보여주었다.
와츠에서 일어난 무법 천지의 흑인 폭동은 그 후 사우스 센트럴 지역에서 그나마 조금 있던 백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이른바 “백인들의 도주 (white flight)”현상을 낳아, 이 지역의 쇠락을 더욱 부채질했다.
특히 흑인 지역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오던 유대계 상인들이 폭동 기간 중 일어난 약탈과 방화, 살인에 진저리 치면서 점차 흑인 지역을 떠났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그 뒤에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들이 주로 차지했다. 이로써 유대인과 흑인의 갈등은 나중에 한흑 갈등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전개되었다. 와츠 폭동이 일어난 지 벌써 56년 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