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2년 조용하고 평화롭던 메사추세츠주의 셀렘 마을은 느닷없이 마녀 사냥 소동이 빠져들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재판을 통해 무려 19명의 마을 여자들을 교수형에 처했다. 지금 생각하면 집단으로 미치지 않고 서야 그렇게 끔찍한 처형을 할 수는 없었다. 셀렘의 마녀 재판이 보여준 집단 광기 의 무서운 장면은 그 후 곳곳에서 여러 번 되풀이 되었다.
중세에서부터 심심치 않게 벌어진 마녀 소동이란 대개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때로는 스페인 종교재판 처럼 소수파 숙청의 핑겟거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17세기말에 영국 식민지였던 셀렘 마을에서는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셀렘 마녀 재판에서 주민들이 보여준 그 광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상황을 보아야 한다. 17세기 후반에 들어 농토가 척박하여 살기가 어려웠던 식민지, 끊임없는 아메리칸 원주민의 위협, 두창과 같은 무서운 전염병의 유행은 마을 사람들의 신경을 극도로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 아이들이 이유없이 몸을 떨거나 괴성을 지르는 현상을 보이자, 다른 여자들도 그런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한 현상으로 공포에 질린 마을 사람들은 여자들의 그런 현상의 배후에는 마녀가 있다고 단정하고, 마녀 색출에 나섰다.
그 후 셀렘 마을 주민들은 서로를 마녀 또는 마귀라고 고발하여, 마을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매우 나빠졌다. 결국 사람들로부터 마녀로 지목된 여자들이 색출되어 재판을 받았다. 하지만 완전히 흥분한 사람들 틈에서 정상적인 재판은 기대하기 어려웠고, 일부 피고인들은 강요로 인해 자기가 마녀라고 자백하기도 했다. 물증이나 근거없이 피고인들에 사형이 선고되고, 그들은 바로 처형되었다. 1692년 8월 20일 하루에만 5명의 여자들이 처형되었다.
지금 살펴보면 이 때 처형된 여자들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이 당시에 사회적 약자라는 것은 여자로서 배우자가 없거나, 가난하거나, 장애가 있거나 혹은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셀렘 주민들은 재판이란 절차를 빌어, 약자들에게 사회적 폭력을 행사한 셈이다. 나중에 셀렘 사태가 외부에 알려지자 셀렘 주민들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나중에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17세기 셀렘 마녀 재판은 인간들이 극한 상황에 처하면 얼마나 잔인하고 비이성적으로 변하는 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법이므로, 20세기에 들어서서도 마녀 재판은 얼마든지 흔하게 일어났다. 이른바 1960년대 중국의 문화 대혁명 시기에는 홍위병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여 공개 처형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미친 광풍에 휩쓸린 중국의 청소년들은 중국 전역에서 폭행, 파괴는 물론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셀렘 마녀 재판은 황당하지만 결코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문화 대혁명 시기에 중국인들이 보여준 것과 같은 집단적 광기는 지금도 곳곳에서 사회를 지배한다.
어찌 중국뿐이랴.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증오 이데올로기는 사회를 여러 갈래로 찢어 놓고 있다. 집권층 주변에서도 시민들에게 부릅뜬 눈으로 죽창을 들고 나가자고 선동하는 자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셀렘의 마녀 재판이 보여준 집단 광기 는 현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난동과 학살로 얼룩진 역사의 그늘 밑에는 그런 자들의 선동에 휩쓸린 자들의 뒤늦은 후회로 가득하다. 셀렘 마녀 재판의 교훈은 지금도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