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을 맞아 다시 사이판 전투의 비극을 기억하자. 1944년 6월부터 7월까지 벌어진 사이판 전투는 전쟁의 처참한 실태를 보여준 지옥의 전투였다. 사이판 전투는 공격하는 미군 약 7만여 명과 수비하는 일본군 약 3만여 명, 그리고 수 만명에 달하던 일본인 민간인들이 참가하여 진행되었다.
그 때, 일본군으로서는 이 섬을 사수해야만 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일본 본토 공습 문제였다. 이 섬에서 발진한 미군 폭격기들이 일본 본토를 공습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게다가 다른 섬들과는 달리 사이판은 제1차 세계 대전이후 일본이 연합국으로부터 선물 받은 땅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일본의 영토였다. 일본은 이 섬에 많은 민간인들을 이주시키고 대대적으로 사탕수수를 심는 등, 섬에 많은 공을 들였다.
처음에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미군이 쉽게 승리할 줄 알았지만,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과 미군 병사들의 낮은 사기로 인해 뜻밖에 전투가 길어졌다. 마침내 미군 병사들도 3천 명이나 전사하고 만 여명이 부상당하는 등, 미군의 희생도 컸다. 하지만 결국 30여 일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 중장 사이토 요시쓰구가 지휘하던 일본군은 거의 전원 전사하거나 자살하게 된다. (이 사이판 전투를 배경으로 영화 “윈드토커 (Windtalkers)”가 2002년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때 미군의 공격을 피해 산속에 숨었던 일본 민간인들이 이른바 “만세 절벽”에 올라가서 차례로 투신 자살하는 모습이 미군 병사들은 물론 미군 지휘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머뭇거리며 절벽에 올라선 일본인 부인들이 품 안의 아이를 아래로 던지고, 자기도 투신하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이 것은 무지한 인간들이 거짓 선동에 속으면 어떤 짓을 하게 되는 지를 보여준 집단 광기의 증거였다.

만세 절벽이 있는 사이판 섬 북쪽에 가면 즐비하게 늘어선 일본군 전몰자 위령비들을 볼 수 있다. 그 많은 탑과 위령비를 보면 마치 일본군들이 희생자인 것처럼 생각된다. 천만에! 강제로 끌려와 노예처럼 학대받던 한국인들에게 그들은 잔인하고 흉폭한 야만인들이었다.
사이판 전투에서 희생된 한국인 위령비는 오늘날 일본인 위령비로 가득한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외롭게 있다. 가해자이자 전범자들의 혼을 기리는 위령비는 수 십개가 늘어서 있는데, 정작 피해자인 한국인들의 위령비는 구석진 곳에 그나마 몇 개 되지도 않는 것을 보면 화가 날 수 밖에 없다.
이제라도 한국인들이 대규모로 희생된 사이판 전투의 비극을 기억하자. 도대체 정부는 사이판과 남태평양에서 희생된 한국인들을 위해 지금까지 무엇을 했나? 매년 광복절을 맞아 매년 엄청난 돈을 들여 축제나 하는 그런 형식적인 기념식을 하지 말고, 현지에 추모 공원이라도 좀 잘 꾸미고 희생자들의 유해를 찾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아직도 해마다 광복절이면 고관대작들이 둘러 모여, 화려한 쇼나 하고 공연이나 보는 그런 일이 매년 계속되는 것을 보면 그저 한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