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8월 21일, 뛰어난 선동가였으며 공산주의 이론가였던 레온 트로츠키가 망명지인 멕시코에서 암살 되었다. 마치 한편의 영화같던 그의 마지막은 그후 수많은 영화와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그를 쫓아낸 스탈린에게 자비는 없었다.
트로프키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유대인 출신이었다. 그는 자기 이름을 딴 “트로츠키즘”이란 사상을 남겼을 정도로 공산주의 이론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트로츠키는 일찍부터 공산주의에 눈을 떠, 레닌과 같이 러시아 혁명을 모의하다가 시베리아로 두 번이나 유형을 가는 등 큰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1917년 혁명이 성공하자 그는 외무장관직을 맡아 독일과의 단독 강화를 맺어 제1차 세계대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 후 트로츠키는 소비에트의 정규군인 적군 (Red Army)를 지휘하여 이른바 적백내전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을 무너뜨리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1924년 레닌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함께 끝났다. 그 뒤에 벌어진 권력 투쟁에서 그는 잔인하고 간교한 스탈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스탈린에 맞서다가 멕시코로 도주했다. 그 곳에서 트로츠키는 막강한 보디 가드와 요새같은 저택에서 숨죽이고 살았다. 하지만 스탈린은 언제가 트로츠키가 다시 돌아와 자기를 쫓아낼 것이라는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이 후환을 없애려고 보낸 자객들이 계속 트로츠키의 암살을 시도했지만 운좋게 그는 살아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침내 1940년 8월 21일, 스탈린의 지령을 받고 파견된 소련 비밀 정보국 요원이, 그의 머리를 얼음을 깨는 송곳으로 찔렀다. 혁명가 트로츠키는 하루 뒤에 병원에서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레닌의 충실한 동지이자 공산주의 이론이 세워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트로츠키가 망명지인 멕시코에서 암살 되었다.

트로츠키는 레닌처럼 뛰어난 이론가이고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으며, 함께 생사를 넘나든 동지였다. 하지만 레닌은 그를 후계자로 임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리 트로츠키가 잔인하고 폭력적이라 하더라도 레닌은 그가 결국은 저 짐승같은 스탈린을 이기지 못할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트로츠키에 비해 스탈린은 당내 서열은 훨씬 낮지만 그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자였다.
정부의 인사 문제에서도 트로츠키가 자격이나 사상을 중요시하는 반면에, 스탈린은 오직 자기에 대한 맹목적 충성만 보았다. 그러다 보니, 스탈린 근처에는 자격은 형편없지만, 스탈린에게 잘 보여서 한 자리하려는 돌격대원들이 넘쳐났다.
레닌 사후에 일어난 권력 투쟁 과정에서, 점잖은 트로츠키는 무식한 스탈린과 그 일당들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레닌 사후에 대세는 트로츠키였으므로, 트로츠키측이 “설마..?”하며 방심하고 있었다. 그 틈에 스탈린은 기습을 가해 트로츠키파를 몰락시켰다.
역사는 늘 그런 식이다. 문화적으로 융성하던 로마가 야만인들인 게르만족에 무너지고, 문약하던 송나라가 잔인한 몽고에게 무너진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권력안의 인간들이나 일반 국민들이나 간에 마음이 약한 자들은 마음이 거친 자들에게 당하지 못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