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지만, 공식적인 항복은 그로부터 17일이 지난, 9월 2일 이루어졌다. 일본이 공식적으로 항복한 날, 일본 대표로서 항복 문서에 서명한 자가 당시 일본의 외교부 장관 시게미쓰 마모루 (重光葵)이다. (참고:重光葵)지금 그의 일생은 역사의 흔적으로만 흐리게 남았으나, 시게미쓰 마모루를 보면 관료의 정체를 알 수 있다.
그는 매우 똑똑하고 재능이 있었다. 시게미쓰 마모루는 당시 일본 외교관 중에서도 영어를 썩 잘하고 또 국제법에도 조예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제 정세에도 나름 정확한 판단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일본이 제이차 세계 대전에 개입하면 안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태평양 전쟁에도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다 믿을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시게미쓰 마모루가 일제의 관료로서 일제를 위해 몸 바쳐 일한 일제의 충복이었다는 점이다. 시게미쓰 마모루를 보면 관료의 정체를 알 수 있다. 관료는 영혼이 없다고 누가 그랬던가? 지금 그가 일제를 위해 충성을 다하면서 내면으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일제의 전쟁 참여와 확대, 그리고 침략의 방침을 국제 무대의 선봉에서 합리화한 자이다.
그 결과, 시게미쓰 마모루는 도쿄 전범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7년 형을 받고 4년 7개월 만에 출소했다. 출소한 이후, 그는 다시 외교 무대에 뛰어 들어 1956년에는 일본의 유엔 가입을 성사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우리에게 그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날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이른바 천장절 기념식장에서, 연단 위에 있던 시게미쓰 마모루는 윤의사가 던진 폭탄이 터져 다리 하나를 잃었다고 한다. 그는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 후 의족을 하게 되었다. 시게미쓰 마모루가 1945년 9월 2일 미주리호 전함에서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는 다리로 걸어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우리는 자연히 윤봉길 의사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항간에는 그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한국인의 후예라는 주장도 있고, 심지어 재일 교포이자 국내 대기업 회장이던 모씨와 친척 관계라는 소문도 있다. 하지만 그런 소문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만약 그런 소문이 사실이라면, 시게미쓰 마모루가 보통의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스럽게 살았다는 점에서 그의 인생이 더욱 씁쓸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