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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장씨를 위한 변명

사림파, 특히 서인 노론파가 주류이자 정통으로 인정받는 우리나라에서 서인에 밉보였던 사람들은 아직도 역적의 누명을 벗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숙종 때 인물로 유명한 희빈 장씨 (장희빈) 이다.

희빈 장씨는 우리 사회에서 지금도 표독하고 악랄한 팜 파탈로 낙인찍혀 있다. 하지만 그녀의 집안이 남인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녀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희빈 장씨나 인현왕후에 대한 선입관은 김만중을 비롯한 서인 세력들이 꾸며낸 이야기인데, 그들이 역사의 승자이니 지금도 그들의 이야기가 마치 진실인 것처럼 남아 있다.

희빈 장씨는 원자 (훗날의 경종)을 낳은 중전이었는데, 그녀를 중전의 자리에서 갑자기 끌어낸 이유는 석연치 않다. 분명 희빈 장씨에게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는 1694년에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잠은 이른바 “갑술환국” 탓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숙종이 중전에서 다시 후궁이 된 희빈 장씨를 굳이 사약을 내려 죽여야 했던 이유 또한 분명하지 않다. 기록에는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하려고 굿을 한 것이, 인현왕후가 죽은 뒤 밝혀진 것이 이유라고 하지만, 그 것은 아마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혹시 남인들이 다시 살아 올까 봐, 남인 세력의 상징인 희빈 장씨를 죽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숙종은 서인들과 공모하여 남인의 잔존 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아내를 죽이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사실 희빈 장씨를 모함하는 그런 고변을 한 자는 인현왕후 사후 희빈 장씨와 대립관계에 있던 숙빈 최 씨 (동이, 영조의 생모)였다. 원래 천한 신분이라 딱히 의지할 곳이 없었던 숙빈 최씨는 일찌감치 서인 쪽에 의탁해서 보호를 받고 있던 여자였다.

숙빈 최씨의 고변을 들은 숙종은 즉시 희빈 장씨의 궁녀들을 고문하여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굿을 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조선 시대에 궁녀들처럼 어린 여자 아이들에게 고문을 하면, 어느 누가 버틸 수 있단 말인가?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궁녀들이 고문에 못 이겨 “자백”한 것 만을 근거로 숙종은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사실 희빈 장씨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억울하고 터무니 없는 모함이었을 것이다.

아마 숙종도 바보가 아니므로 마음 속으로는 희빈 장씨가 무죄라는 것을 알았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숙종은 이 사건 이후 그런 죄를 날조한 숙빈 최씨를 인현왕후의 뒤를 이어 중전으로 삼기는 커녕, 궁에서 내치고 다시는 찾지 않았다. 또한 서인들이 쏟아내던 그 많은 상소에도 불구하고 희빈 장씨의 소생인 세자를 결코 폐하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숙종이란 사악한 인물이 서인과 남인을 번갈아 중용하면서 세력 균형을 통한 왕권 강화를 꾀하는 와중에, 양 측에 의해 대표적 인물이 된 불쌍한 여자들만 희생된 셈이다. 하지만 이 때 숙종이 남인들을 숙청한 것은 큰 실수 였다.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서인들의 잔인하고 무책임한 독재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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