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12월 21일 마리 퀴리 (Marie Curie)와 그녀의 남편 피레르 퀴리가 라듐을 발견했다. 마리 퀴리 부부는 이 발견으로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마리 퀴리는 비운의 나라 폴란드가 자랑하는 몇 안되는 국제적 인물이다. 과학이 조금씩 눈을 뜨던 19세기가 지나고 20세기에 접어들자 과학계는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여성 과학자는 여전히 그저 호기심이나 차별의 대상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프랑스에서 살았지만 가난하고 작은 나라 폴란드 출신이었다. 하지만 마리 퀴리는 그런 악조건 들을 뿌리치고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여성 과학자가 되었다. 게다가 마리 퀴리는 8년 뒤에는 혼자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생전에 그녀는 과학계에서 “— 을 한 최초의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수 없이 받았다.
그녀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또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민자였기 때문에, 사회는 마리 퀴리의 과학적 업적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다. 프랑스 언론은 마리 퀴리를 끊임없이 공격하고 비웃었다.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을 때, 사람들은 마리 퀴리가 남편의 공로를 가로챘다고 비난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 프랑스 사회는 그녀가 유부남인 제자와 간통을 했다고 비난하며 그녀의 두 번째 노벨상 수상을 반대하기도 했다. (Don’t Come to Stockholm! Madame Curie’s Nobel Scandal)
그렇다. 그녀는 고집불통이고, 다소곳하거나 조용하지 않았으며 자기 연구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어쩌면 그래서 그녀가 그 험한 시대에 뛰어난 과학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마리 퀴리는 21세기에 활동했다면 엄청난 찬사를 받았겠지만, 그녀가 활동하던 20세기 초의 유럽은 여성 과학자에게 호의적인 시대가 아니었다. 곳곳에서 그녀를 노리는 눈빛 사이에서, 시대를 앞선 천재는 힘들고 외롭게 살았다. 마리 퀴리의 고난 마리 퀴리의 고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