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210년 전인 1812년 1월 평안북도 가산군에서 대규모 반란의 횃불이 올랐다. 평서 대원수 홍경래를 비롯하여 김사용, 우군칙, 이희저 등이 이끄는 반란군은 삽시간에 정주와 의주 등 평안도의 주요 지역을 함락시키고 평안도 일대를 석권하여 한양의 조정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반란 소식에 깜짝 놀란 조정은 급히 이요헌, 박기풍을 수장으로하는 진압군을 파견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치밀하게 반란을 준비했다던 반군은 뜻밖에도 곧 기세가 주춤해졌다. 제대로 군사 교육을 받지 못한 반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평안도의 지방 병력이 아니라 중앙에서 정규군이 몰려오자, 반란군은 안주에서 패배한 이후 2월 13일부터 정주성에 틀어박혀 농성했다.
이처럼 반란군이 고립 무원의 처지에 놓이자, 이미 그들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다. 사지에 몰린 반군은 죽기 살기로 싸웠지만 5월 29일 성이 함락되어 홍경래의 난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끝났다. 봉건 시대에 실패한 반란군의 말로는 비참했다. 홍경래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모두 한양으로 압송되어 참형을 당했고 정주성에서 체포된 2,983명 중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1,917명 전원이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는 서북 지역의 차별이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서북 지역이 참을 수 없는 대우를 받아왔다면, 왜 서북 지역 사람들이 모처럼 일어난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을까? 또 홍경래 일당이 바보가 아닌 이상, 평안도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동시에 반란을 일으켜야 자기들에게 유리하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평안도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아무도 호응하는 자가 없었다. 썩어 빠진 세도 정치의 폐해로 온 나라가 고통을 받고,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온통 부패하고 무능한 관리들만 배를 채우던 순조 시대에, 어째서 반란에 대한 호응이 이처럼 적었을까?
반란 초기에 정주성과 의주성이 함락되고 반란군이 파죽지세로 평안도 일대를 공략할 때도 인근의 황해도나 함경도에서 반란군에 대해 전혀 호응이 없었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에 조선 왕조가 아직 인기가 많았을까? 조선의 행정 제도가 매우 효율적이었단 말인가? 당시 조선의 백성들이 바보였을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만을 남긴 채 홍경래의 난에 대한 진실은 아직도 암흑 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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