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Home 1968년 테트 공세가 보여준 좌파의 민낯

1968년 테트 공세가 보여준 좌파의 민낯

1968년 1월 30일, 남 베트남 국민들은 민족의 대명절인 음력설 (테트)을 준비하고 있었다. 테트 기간 도중에는 일체의 도발을 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으므로, 미군도 남베트남군도 모두 긴장을 풀고 명절 연휴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1월 30일 갑자기 수도 사이공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북베트남 정규군과 남베트남 게릴라 (베트콩)들이 일제히 주요 시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게릴라 활동이 아니었다. 공산 군측은 그 전 해인 1967년부터 은밀히 테트 공세를 준비해왔다. 하지만 테트 공세를 준비하면서도 공산 측은 계속해서 평화와 화해를 이야기하며 남 베트남 정부의 긴장을 약화시켰다.

남 베트남 정부는 아무리 공산군이라도 민족의 명절인 음력설에 대규모 전투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산군에게 관습이니, 전통이니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마침내 이 날이 되자 무려 50여 만의 공산군 병력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곳곳에서 남베트남 기지가 공격당하고 주요 시설이 점령되었다. 심지어 철벽 요새로 만들어진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에도 공산군이 침입하는 등, 베트콩의 기습 공격으로 남베트남 전역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공산 게릴라들은 모두 40여 개의 도시에서 동시에 공격을 시작했다. 특히 후에를 비롯한 일부 도시는 한 때 게릴라에게 거의 점령되어 버려 주민 수 천 명이 학살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남 베트남 각지에서 학살이 자행되고 수 천 명이 북으로 끌려갔다.

미군들의 피해도 꽤 컸으며 특히 수도 사이공에서 활보하는 베트콩을 TV로 본 미국 시청자들의 충격도 대단했다. 다행히 주월 한국군은 방심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피해가 가장 적었다. 한국군은 이미 한국전쟁 때 공산 측의 기습 작전을 신물나게 보았으므로 그들의 위장 평화 공세에 속지 않았다. 

남 베트남 군과 미군은 충격으로부터 정신을 차린 후, 테트 공세에 반격을 개시하였지만, 이날의 충격에서 회복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테트 공세는 좌파 들이 평화와 화해를 이야기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언어로 “평화”는 곧 “전쟁”이며, “화해”는 “숙청”이다. 그러고 보면 좌파 들은 태어날 때부터 용어의 정의를 다르게 배우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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