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8월 22일, 그 날도 여전히 오키나와에서는 상륙한 미군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잔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일본군은 오키나와의 민간인들을 방패로 내세우는 끔찍한 전쟁 범죄마저 저질렀지만, 오키나와 전투의 승패는 이미 분명히 미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한편 이날 오후 10시 12분 경, 일본측 함선 쓰시마마루 (対馬丸)가 가고시마현 북서 약 10㎞의 지점을 지나던 중, 미 잠수함 (USS Bowfin)의 어뢰 공격에 의해 침몰했다. 6,854톤의 이 배는 원래 영국에서 건조된 화물선이었으나 전쟁 중 일본군에 의해 징발되어 수송선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661명을 태운 쓰시마마루는 오키나와의 나하항을 떠나 일본 본토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 배의 승객이자 희생자들은 대부분 어린이들이었다.
캄캄한 대양에서 침몰한 쓰시마 마루에 승선하고 있던 승객 중 어린이 767명과 승무원 24명을 포함한 1,484명이 희생되고, 구조된 것은 어린이 59명을 포함해서 불과 200여명 뿐이었다.
쓰시마 마루는 오키나와 전투 중에 주로 일본군 병력을 수송하고 있었으므로 미군 측이 이 배를 격침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번에는 일본군 병력 대신 어린이들이 배에 타고 있었는데, 미군은 이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전쟁 중에 일본측은 국민들의 사기를 고려하여 쓰시마마루의 침몰 사실을 숨기고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패전이후 쓰시마 마루 사건은 일본인들의 “피해자 코스프레”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일본은 이 사건의 어린 희생자들을 앞세워, 일본이 마치 전쟁의 희생자였던 것처럼 대대적으로 홍보해왔다.
일본 정부는 별다른 공로도 없는 데도 1972년과 1973년에 희생된 어린이들과 인솔 교사, 보호자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그 뒤 유족들에 대한 거액의 연금 지급, 영화와 드라마 제작 등이 이어졌다.
이로써 일본의 전쟁 책임과 아시아에서 자행된 일본인들의 잔학한 행위에 대한 반성 따위는 잊어버린 채, 마치 순진하고 착한 일본인들이 전쟁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식의 역사 날조가 이어졌다. 그 결과 그날 캄캄한 바다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오키나와의 어린이들은 죽어서도 일본의 정치적 선전물로 박제되어 역사에 남아 있다. (対馬丸語り部 故・平良啓子さん次女 継承は「私たちの世代の役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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