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을 기억하며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을 기억하며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을 기억하며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는 여느 때와 같이 평온한 가운데, 미군과 한국인 병사들과 노무자들이 공동관리 지역내에서 나무 가지 치기 작업을 시작했다. 이들의 숫자는  미군 병사 (장교 포함) 4명, 한국군 장교 1명과 병사 4명 그리고  한국인 노무자 5명이었다.   그런데 10시 50분경 갑자기 트럭을 타고 나타난 북한군 병력 20명이 도끼 등을 동원해 비무장한 남측 인원을 무차별 공격했다. (THE ‘GOD DAMN’ TREE THAT NEARLY BROUGHT AMERICA AND NORTH KOREA TO WAR)

남측 인원들은 대부분 부상을 입었다. 특히 미군 대위 보니파스 (Arthur George Bonifas)씨는 도끼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후방으로 이송 중 사망했다. 그렇지 않아도 긴장이 고조되던 휴전선에서, 이 날 북한 정규군이 백주 대낮에 미군 병력을 공격하여 장교를 살해하는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일어난 1976년에는 남북간의 충돌 위험성이 높아지던 때였다. 그 전해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 공화국의 수도 사이공이 북베트남 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로써 세계는 아시아에서 유일한 분단 지역인 한반도를 주시했다. 미국이 베트남을 버린 것처럼 한국을 버릴 것인가?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의 배경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는 북한의 잔머리가 담겨 있었다.

미국은 강경론과 온건론 중 지체없이 강경론을 택했다. 한국 전쟁 종전 이후 처음으로 “데프콘 3″가 발령되었고, 비상 상황 하에 미국 본토에서 대규모 병력과 함께 엄청난 전략 무기들이 한반도에 집결했다. 이런 엄중한 상황아래, 미국은 도끼 만행으로 중단된 벌목 작업을 개시했다.

만약 북한이 또 다시 벌목 작업을 방해한다면, 그 때는 제한적인 무력 충돌이 일어날 것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북한은 저자세를 유지했다. 북한군 병력들은 벌목 작전에 투여된 한국군 부대가 북한 측 초소 4곳을 파괴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는 북한조차 1976년에 다시 한국 전쟁을 시작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을 뜻한다. 하마터면 전쟁이 시작될 뻔했던 일촉즉발의 위기는 미군이 문제의 미루나무를 자르고 김일성이 사과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은 베트남과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믿기 어려울만큼 터무니없이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던 북한의 도발은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만들다가, 이렇게 끝났다. 미 제 2사단 소속의 보니파스 대위는 불과 34살의 나이에 이렇게 머나먼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네브라스카 출신으로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베트남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사건 당시 한국 근무 종료를 불과 3일 앞두고 있었다. 그는 사후에 미국 정부로부터 동성훈장을 추서받았고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아서 조지 보니파스 소령
아서 조지 보니파스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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