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판 만적의 난이었던 맷 터너 봉기 이야기

미국판 만적의 난이었던 맷 터너 봉기 이야기
미국판 만적의 난이었던 맷 터너 봉기 이야기

1831년 8월 21일 미국  버지니아주의 사우스햄프턴에서 흑인 노예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사실 이 봉기는 “폭동”이라기 보다는 “무장 투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때 흑인 노예들은 냇 터너 (Nat Turner)의 지도아래 말도 안되는 억압과 학대에 맞서서 일어섰다. 이 과정에서 약 60 명의 백인들이 살해되었다. 제대로 준비되지 못했던 이들의 봉기는 며칠 가지 못했지만, 흑인들의 무장 봉기가 보여준 놀라운 의미와 상징은 미국 전체에 크게 울려 퍼졌다.

순종적이던 흑인들의 조직적인 무장 봉기에 놀라고 겁먹고 분노한 백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흑인들에게 잔혹한 보복을 가했다. 버지니아의 무장한 백인 민병대는 인간 사냥을 통해 120여 명의 흑인들을 사적으로 “처형”했고, 버지니아 주정부는 “재판을 통해” 흑인 58 명을 공적으로 “처형”했다. (Small Town Horror: The Story of Nat Turner’s Rebellion and Its Brutal Aftermath)

주모자 냇 터너는 당시 흑인으로서는 드물게 교육을 받은 목사였다. 그는 봉기가 실패한 후 잠적했다가 결국 체포되었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확실히 냇터너 봉기는 폭력적이었고 과격했다. 그러나 지금 세대의 사람들은 누구라도 냇 터너 봉기를 이해할 것이다. 그 당시 미국 사회에 버젓이 자리잡았던 흑인 노예제도는 그보다 몇 천 배, 만 배 더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다.

고려 선종 1년 (1198)년에는 이 땅에서 노비 만적이 이끌던 “만적의 난( 萬積의亂)”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냇 터너 봉기처럼 만적의 난도 비록 실패했지만, 그 당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노비들이 일으키려고 했던 무장 봉기로 노비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강제로 납치되어 미국에 끌려온 뒤, 폭력적으로 “길들여짐”을 당했고 그 후손들은 대대로 가축 취급을 받았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사람 취급을 받기 위해서는 140여 년이나 기다려야 했다.

수도 개경에는 청자 기와집이 넘쳐났다는 번영했던 고려 귀족 사회의 그늘에는,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하고 소리 없이 죽어간 노비들의 비극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빠르게 일어난 미국 사회의 번영과 성공의 그들 아래에는 이처럼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사회 시스템이 숨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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